▲ 지구는 Hemisphere 그러쵸? 그러췌?
말랑하게 솝흐트솝흐트한 과제로 제출한 거니까 병신소리 많아도 너무 뭐라하지는 마셈 ㅇㅇㅇㅇㅇㅇ
각주는 존내 달았는데 빌어쳐먹을 한글 2007이 다 씹네여 ㅋ 무시 ㅋ
처음에 황상(숙종)은 속히 경사를 차지하려고 회흘(위구르)과 약속하여 말했었다.
“성에서 이기는 날에 토지와 사인과 서민은 당으로 돌리고 황금과 비단 그리고 자녀는 모두 회흘에게 돌려주겠다.”
이때에 이르자 엽호는 약속대로 하려고 하였다. 광평왕 이숙이 엽호의 말 앞에서 절을 하며 말했다.
“지금 처음으로 서경(장안)을 얻었는데 만약 갑자기 포로로 잡고 약탈하면 동경(낙양)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역적을 위하여 굳게 지켜서 다시 차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니 바라건대 동경에 도착하면 마침내 약속대로 하시지요.”
엽호는 놀라며 말 아래로 뛰어내려 맞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왕의 다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응당 전하를 위해 동경으로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즉시 복고회은과 더불어 회흘과 서역의 군사를 이끌고 성의 남쪽을 지나가 산수의 동쪽에 군영을 세웠다. 백성, 군사, 호족 포로들은 이숙을 보고 절을 하고 모두 울며 말했다.
“광평왕께서는 진실로 한인과 이족의 주인이십니다!”
- 자치통감 권 220 당(唐)기 36 숙종 지덕 2재
“19세기 중반 동아시아에 뒤늦게 역사의 태풍이 불어닥쳤다. 중국중심의 전통 천하질서가 구미중심의 근대 국제질서로 탈바꿈하는 문명사적 대변환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주인공은 천하국가에서 국민국가로, 중심무대는 예에서 부국강병으로, 연기 원칙은 사대자소에서 자강균세로, 그리고 제도는 조공에서 상주사절로 바뀌게 된다.”
명료하고 속편한 정리이다. 그러나 결코 중정하지는 못하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1894~1895년의 전쟁이 한국 근대사상 가장 큰 전기 중의 하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면, 최소한 진소위 ‘천하·국·가 체제’란 100년 이상 부당한 평가와 매도, 그리고 오해에 직면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외교사학에서 정궤를 이룬다고도 볼 수 있는 이러한 비난의 레퍼터리는 정해져 있다. 1. 비효율성이 지적된다. 2. 불균형이 명실 양면에서 강제된다고 하는 윤리적 판단이 개재된다. 3. 2의 연장선상에서 오만한 문명중심/표준으로서의 시대착오성이 강조된다. 선생님의 세 가지 의론은 기존의 이와 같은 선견에 입각한 지리멸렬한 역사해석에서 벗어나, ‘연속성 하에서의 전환과 선택’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그 온당함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완전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우선 논리적인 모순 자체가 존재한다. 과거사-현재사-미래사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각각 공시적인 상위를 이해하기 위해 그 전계(前階)로의 추급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설명과는 달리, ‘연속성 자체’는 촌단당한 과거사, 현재사, 미래사의 덩어리를 억지로 끈으로 이어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환언하면 ‘선택에 의한 이천(移遷)의 과정’이 아니라 ‘선택에 의한 단절적 전환’만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박규수의 문도를 들어 ‘물꼬’를 짚어내고 있으나, 정작 1880~90년대와 유길준으로 넘어오면 약하지만 퍼져나가기 시작하는 ‘물줄기’나 그 이전의 ‘수원’은 온데간데 없고 덩그러니 ‘문명개화’의 논두렁이 솟아오고 있다. ‘증공국’이라는 신조어휘와 <답청사조회>의 매끄러운 응대는 마치 근대적 국제관계의 신역에 발을 담근 유길준이 개안하여 기염을 토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미 동주(東周)의 평왕(平王)대에 천자와 정백(鄭伯)은 19세기말 청조가 궁하게 만들어낸 ‘속방’의 규정에 의한 관계를 면해 ‘증공국’이나 다름없는 지위에 처해 있다. 이는 좌전에 나오는 것으로, 어린 유길준이 외다시피 기본소양으로 체화하고 있었을 텍스트이다. 진정 ‘연속성’ 자체를 중시한다면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일면이다.
다른 한 가지는 ‘천하·국·가 체제’에 대한 이해가 극도로 피상적이고, 이로 인해 ‘근대전환’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는 전통적인 이해의 궤에서 조금도 벗어나고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선 용어의 규정 자체가 무리가 있다. ‘천하국가’는 ‘Under The Heaven'의 일통된 실체로 구겨넣어진 무리한 개념이 결코 아니다. 또한 ‘천하국가’라는 단일어휘는 성립하지 않는다. 월러스틴적 의미의 ’세계-체제‘로 보아도, 로이드 이스트만이나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지적한 ’완결적 세계로서의 중국‘의 개념을 이용하더라도 그것은 ‘천자’의 ‘천하(직할속령의 의미를 강조한다면 중국(中國)으로 표현할 수는 있다)’와 이하의 수작체계(受爵體系)에 따른 국체들인 ’國‘과 ’家‘의 병립체제로 규정되는 것이다. 이런 명백한 개념어의 분위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우위를 이용해 자신의 문명표준을 터무니없는 지경(地境)에까지 강제했던 중국’이라고 지탄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선생님께서는 ‘근대전환’을 말하면서 ‘천하국가 체제’로부터 ‘근대 국제관계’로의 단절적 전환을 명시하시고 있지만, 실제 ‘천하·국·가 체제’에 대한 적확한 이해 없이 단락적으로 이런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위의 레퍼터리 3과 별반 나을 바가 없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비루하게나마 특히 후자에 초점을 맞추어, 전근대 국제관계의 성격은 어떠했는가, 그 문명(紋名)과 질실(質實)한 면은 과연 전근대의 국체들에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인가, 또한 과거사로부터의 ‘연속’이라는 측면에서 이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를 감히 보론으로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성적표 : 우리는 1등번속입니다
논의를 시작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긍정해야 할 명제가 있다. 그것은 전근대 ‘천하·국·가’ 체제에서 조선은 ‘우등생’이자 ‘Good Player'였다는 것이다. 아래의 표는 그것을 드러내는 가장 직접적인 근거 중 하나이다. (표 이전 포스팅에 써쳐먹은 거라 생략)
세 표는 각각 청대 강희, 옹정, 건륭 연간에 청조로 사행을 온 국가들의 목록이다. 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130년이 넘는 기간동안 조선이 사행을 보내지 않은 해는 단 1년도 없다. 횟수의 충실함 뿐 아니라 그 내역도 풍영하기 그지없다. 사행목적 자체의 다종다격함이 다른 번속을 압도하는 것이다. 중조의 유사나 황제가 묻는 것이 있으면 주문사(奏聞使)를 보냈다. 책봉/책명이 필요하거나 薨한 자의 諡가 필요하면 주청사(奏請使)를 보냈다. 이것을 들어주어 회보(回報)하는 바가 있으면 사은사(謝恩使)를 보냈다. 이외에도 경사에 보내는 진하사, 조문을 위한 진위사/진향사, 범월한 죄인을 돌려보내는 관송사 등 명위와 목적을 갖춘 사행이 꼬리를 이었다. <대청회전(大淸會典)>에 명시된 번속의 입공횟수는 대부분 2~3년에 1공으로 되어 있으나, 실로 숙번(熟藩)이랄 수 있는 조선만은 1년 4공으로 규정되어 있었는데, 이조차도 넘기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는 것은 선생님께서 자주 표현하시는 것처럼 ‘게임의 룰이 예의인 상황에서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는 최고 득점자였다’는 것과도 부합되는 일면이 있다.
실제로 조선은 그만큼 극성이었고, 그 ‘예의에 대한 예의로서의’ 보상은 달콤했다. 강희연간에 세 차례, 건륭연간에 네 차례에 걸쳐 각기 성조와 고종은 조선에 가까운 성경(盛京)의 산릉을 찾았고, 그때마다 조선은 예외없이 문안사를 보냈다. 이에 청은 1743년에 고종이 직접 ‘式表東藩’라는 친필 편액을 내리고, 1778년에는 책명위지례의 중요한 연회를 베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입공하여 ‘東藩濟美’라는 편액을 다시 내렸으며, 1783년에는 직접 지은 시와 70을 맞아 지은 글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것으로는 전근대스러운 아취나는 미담으로 끝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중조와 번속의 관계가 이것으로 다했던 것일까? 환언하면 단지 ‘현대와는 전혀 다른 문명표준’에 입각한 ‘文飾적인 자위’를 위해 ‘천하·국·가 체제’의 행위자들은 행동했던 것인가? 실은 그렇지 않다.
평가기준과 출제 의도 : 예제, 천하질서의 실체와 진의
‘천하·국·가 체제’의 실질적 성격이 과연 어떠한 것이었고, 그 속에서 행동한 행위자들이 어떠한 목적과 명실상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운남에는 무리 수십만이 있었는데, 토번이 매번 쳐들어오면 항상 운남을 선봉으로 삼았고 부세를 거두어들이는 것이 무겁고 잦았으며, 또 그들의 험고를 빼앗아 성보를 세우고 해마다 군사를 징발해 방어를 돕게 하니 운남에서는 그것을 괴로워했다. 정회는 이어 이모심에게 당에 다시 귀순하라고 유세하였다.
“중국은 예의를 숭상하고 혜택이 있지 부역은 없습니다.”
이모심은 그러하다 여겼지만 길이 없어서 스스로 이르지 못한 것이 무릇 십여 년이었다.
- 자치통감 권232 당기 48 덕종 정원 3년
이것은 안사의 난을 전후한 ‘천하’이자 ‘중국’인 당조(唐朝)와 그 ‘번속국’인 남조(南詔)의 기나긴 줄다리기 중에 있었던 촌극의 한 장면이다. 남조는 현재의 운남-베트남 일대에 위치한 월(越)계의 만족(蠻族) 국가였다. 현종 천보 9재(載, 750)에서 11재(752)에 걸친 일련의 사건들로 당조의 외신(번속)의 지위를 벗어나 경쟁국이자 명목상의 구생(舅甥)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또다른 번속인 토번(吐藩)에 신속했던 남조는 당조에서 안사의 난이 끝나고 이어진 역내 강번(强藩)들의 반란이 진정세에 접어든 780년대에 이르면 다시 토번으로부터 벗어나 당조에 신속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남조가 근린의 길항하는 두 강국인 토번과 당조 사이에서 이와 같은 갈짓자의 행보를 보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명위와 질실한 측면 두 가지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다. ‘게임의 법칙’ 측면과도 부합되는 것이지만, 전근대 국제관계로서의 ‘천하·국·가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협상의 수단’이자 ‘직접이익의 대상’ 중의 하나는 바로 ‘위신재’이다. 오늘날의 국체는 그 실재의 명분을 합의하에 결정된 국헌상에 명시되어 있는 주권과 그 체제에 대한 보편적, 국제적 인정에 의거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위신재의 공급은 공급주체가 다소 일방적이고 그 기준이 보다 획일적이라는 특질을 빼고는 다를 것이 없다. 대내적으로 수권을 확립한 정치주체가 역내 최수위국이자 ‘문명표준의 최대 생산자’에 대한 위지/입조와 그에 대한 급부로서의 책명/책봉으로 권위를 확인받는 것이다.
위신재의 지위와 성격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 적실성을 잃을 수 있고, 이 위신재의 ‘수급대상’은 이러한 전기에서 결코 수동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능동적인 선택을 해 왔다. 조위(曹魏) 시기에 야마타이국을 중심으로 연맹왕국을 수립한 왜인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긴 상쟁 끝에 일정수준의 통일국체를 완성한 그들은 더 이상의 병란을 막기 위해 위신재의 공급처를 수배했고, 처음에는 한관(漢官)인 태수로서 요동에 할거하고 있던 공손씨에게서 그것을 구했다. 그러나 요동왕을 자처했다손 치더라도 결국은 조위의 지방관에 지나지 않았던 공손씨는 그들에게 충분한 권위를 부여하지 못했고, 때마침 명제(明帝)가 공손씨를 토멸함에 따라 야마타이는 조위와 직접 접촉해, ‘황제’로부터 ‘친위왜왕’이라는 위신재를 받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남조의 경우 여기에 보다 실질적인 이유가 더해졌다. 천보 11재에 최종적으로 운남군(郡)의 통어를 완전히 벗어나고 6조(詔)의 1조로의 통일이 완료된 시점에서 그들이 새로이 신속하여 토번으로부터 받은 작호(爵號)는 동제(東帝)였다. 토번의 국주(國主)인 찬보와 등격으로 대우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술한 덕종 연간이 되면 일동왕(日東王)으로 깎이고 있다. 이와 같이 기대하는 위신재의 수준이 낮아졌을 뿐 아니라, 토번이 당에 대한 침구를 반복하면서 제2정면이라 할 수 있는 검남 일대의 방비를 남조에 크게 담역시키고 병원(兵員)마저 추출해감에 따라 즉물적인 측면에서의 착취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던 것이다. 이전 천보연간의 운남 태수나 숙종-대종-덕종 시기의 검남절도사의 물화 수탈도 결코 적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전역(戰役)의 강제로는 이어지지 않았다는 면에서 정회가 “중국은 예의가 있을 뿐 부역은 없다”고 한 것은 절반은 진실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외번들이 위신재의 획득이라는 면에서 얼마나 약삭빠르게 행동했는가는 또 다른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804년 서산(西山) 조를 최종적으로 압복시킨 가륭제(완복영)가 청조에 신복하고 국호를 내릴 것을 청해 왔는데, 처음에 그것은 남월(南越)이었다. 그런데 이는 서한(西漢)대 무제(武帝)가 정토했던 조타의 남월과 국호가 같았고, 이를 꺼린 건륭제는 월남(越南)으로 자순을 바꾸도록 했다. 요청한 가륭제의 비의를 생각하면 약간분의 저항이 예상되는 처사였지만, 의외로 완 조는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바로 몇 년 전(건륭 54년, 1789)에 있었던 계승전쟁에 대한 청조의 직접 군사개입을 의식했던 탓인가? 그러나 이것이 초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청의 패배로 끝났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는 설득력이 없다. 보다 그들의 간지(奸智)를 돋보이게 하는 설명이 여기에 있다. 적어도 근세(16세기) 이후로 베트남어의 일반적 어순은 피수식어가 수식어의 앞에 온다. 즉 중어식 표현으로 ‘남월’이라고 한다면, 베트남어로는 오히려 ‘월남’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이현령비현령인 것이다.
번속국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입조칭신과 책명을 통한 ‘철권(鐵券) 받기’에만 기대는 것은 아니다. 보다 실질적인 안보상의 이유도 분명히 존재했다. 전통적 사대-자소관계상에서 ‘중국황조’라는 거대한 국체를 접하고 있는 것은 장단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면적으로 인해 다정면성과 광정면성을 모두 갖추고 있는 중국은 1차적으로 접변하고 있는 국가에 영향을 준다. 다정면/광정면성 자체로 인해 중국의 대외적인 무력 가능항은 극도로 축소되게 된다. 물론 가용자원과 기술면에서 역내 최수위국을 점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황조가 최소한 ‘Win-Win'이나 ‘1+1’은 아니더라도 한 개 정면에서 대자를 완전히 압복시키거나 무위로 중조의 영역 내에 편입하는 것은 확실히 가능하다고 할 수 있고 그러한 예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서한대의 남월과 조선에 대한 정토를 빼고는 그 대부분이 적어도 충분한 국체의 틀을 갖추고 문명수준을 확보한 대자의 ‘멸망’에는 이르지 않고 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서한 선제 시기 흉노가 내조한 이래 동한대에는 남흉노의 역내 사천을 꾀했으며, 당대에 일릭 카간을 사로잡아 돌궐을 멸망시킨 예가 있으나, 이는 ‘일정 문명수준을 달성한 국가’에 대한 처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제후에게 내리는 ‘철권’에는 ‘자손이 흥륭하고 이어질 것이다’라는 식의 명문이 되어 있다. 구태여 굳세고 마멸되기 힘든 금속제의 신표를 내리는 것은, 이와 같이 ‘책명’하는 것이 곧 ‘중조’에서 아무런 명의도 없이 함부로 ‘伐(이 경우 克이라고 해서는 곤란할 것이다)’하지 않을 것임을 명명하는 것과도 같다. 즉 이것은 1대1 관계상의 1차적인 안전보장인 것이다.
이 1차 안전보장의 외각에 다시 보다 간접적인 2차 안전보장이 성립한다. 그것은 또다시 다정면/광정면성과 관계가 있다. 중국황조와 접변해온 반도의 국체들, 특히 조선의 경우에 이는 매우 극명해진다. 중국황조가 다정면성을 갖고 있음에 반해 보다 면적이 좁은 번속국은 상대적으로 정면의 수가 적다. 반도의 국체의 경우 ‘접변’하게 되면 북부는 대부분의 경우 중국황조만을 대하게 된다. 이것은 환언하면 전술한 1차 안전보장을 고착화한 수위국가에 의해 한 개 정면이 줄어드는 셈이고, 그만큼 번속국의 안보부담은 줄어드는 것이다. 역내의 안정을 확보하고 애매한 완충대역 없이 중국황조가 번속국에 접변했을 때 그것은 극대화되었다. 단적인 예로 원말의 혼란한 사세와 홍건적의 난을 전후한 시기와, 원의 요동행성 평장 유익의 투항에서 나하추와의 결전(홍무 20년, 1387)에 이르는 시기, 이후 요동도사의 3원체계가 확립되고 요동팔참을 점거, 조선과 압록강 연변에서 접변하게 된 후의 시기를 비교하면 이것은 극명해진다. 다소 불완전했던 명조에 비해 청대에 이르면, 이른바 ‘조종발상지’인 동북지역을 중시했던 청조에 의해 변계는 보다 명확하게 정해졌고, 대내의 교통에 장해가 될 수 있는 치안문제와 러시아의 남하 역시 청이 이 지역에서 조직한 포특합팔기와 여타 팔기전력의 배비 및 필요시의 원정에 의해 해결되었다. 조선이 전비를 절약하고 ‘저위의 안태’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예는 이 명위와 실질을 모두 확보하기 위한 수단적인 개념이다. 위신재를 보다 즉물적인 차원의 물화로 간주한다면 예제상의 ‘예’라는 것, 성리학적 구조로 본다면 ‘태극’에 기반한 ‘전근대 단극체제 구조(수위국으로서의 중국황조, 단극이 ‘태극의 원리’를 번속에 공급하는 구조)’ 자체가 본질적 목표로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상기의 두 가지 이익 중 어느 것을 중시했든 간에 그 수급이 여의치 않았을 경우 번속들은 언제나 중조를 ‘버려’왔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예컨대 고려는 익히 송(宋)을 버리고 금(金)에 칭신했다. 문두에 인용한 회흘(위구르)도 피일시 차일시여서, 출병했는데 당조의 보상이 변변치 않자 보응 원년(762, 6년 후)에는 다시 대종의 태자(후의 덕종)에 대해 ‘형제의 예를 이미 취했는데 무도례를 하지 않는다’고 근속들에게 체벌까지 가하고 있다. 전기한 완복영(가륭제) 역시, 서산 조를 패멸시킨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위신재가 필요했을 따름이지, 청조와의 예제적 관계 자체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그 전의 서산 조였던 완문혜(완광평)도 사실상 청조에 반변하고 ‘천병(天兵)’마저 패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재빨리 ‘예제라는 수단’을 타고 건륭제로부터 책립을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수단이지 결코 목표라고는 할 수 없다.
정답시비와 부정채점 : 과연 세계의 충돌인가?
위신재의 수수와 안전보장이라는 명위와 질실함의 양 측면을 살필 때 확인할 수 있는 또다른 면들이 있다. 그것은 놀랄만큼 현재 끊임없이 국제정치학의 대류 상에서 규정되고 학습되고 있는 ‘근현대 이후의 국제질서-국제관계’와 그 특질을 공유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다. 수단의 정격성은 ‘Universal한 예제’로 통하며, 이것은 또 말류까지 인정받을 수 있는 위신재의 생산은 ‘천자의 권위’만을 빌어야 한다는 면에서 안정된 세계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그 권위 아래에 모든 행위자는 일시동인, 평탕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조위-서진시기 이후 육조기를 거쳐 확립된 장군-막부체계 사대자소 체제로부터는 ‘중조와의 친소’에 따른 우열은 있으나 ‘번속국간의 실질관계상의 우열’은 존재하지 않았다. 바꾸어 말하면 왜왕이 진동장군을 받고 백제왕이 진동대장군을 수직했다 하더라도, 일단 개부한 ‘두 나라’간의 우열은 성립하지 않는다-백제왕이 왜왕에 대해 승제(承制)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명대를 넘어 청대까지도 이어졌고, 기본적으로 관백 도요토미와 조선왕 선조 간의 화의도, 18세기 울릉도 관련협상에서 대마번주-막부와 조선왕 숙종 간의 협의도 그러한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천하, 국/가라는 ‘천하·국·가 체제’의 행위자들의 격의를 명확히 해 보자. 전술한 대로 ‘천하국가’라고 하는 일통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레퍼터리 2, 3에서 지적되는 것과 같은 ‘공박받아 마땅한 자기중심적 개념’이란 실질상으로도 존재하지 않았다. 즉 간단히 말하면 ‘전 세계로 국가를 삼는 국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래된 정명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예컨대 맹자는 “천하의 근본은 국에 있고, 국의 근본은 가에 있으며, 가의 근본은 신에 있다”고 설하고 있다. <대학>에는 “명덕을 천하에 밝히려면 반드시 먼저 그 국을 잘 다스려야 하고, 그 국을 잘 다스리고 싶으면 반드시 그 몸을 잘 닦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서경>등에 명시된 사이-오방-오복의 관념과 이것을 연결해 보자. 그 중심에는 왕기/전복 혹은 중국(中國)이라는 존재가 있다. 그 외변은 분명 ‘중국’의 여집합이다. 중조는 익히 중하(中夏)라고도 쓰이고, 그것을 대칭하는 고유명사로서 天下는 유사 이래 확대되어 왔지만 분명히 지리적 한역을 갖고 존재해 왔다. 그것은 華夏의 문위가 닿는 영역이고, 天子의 영제가 어떻게든 간접적으로라도 뻗는 영역을 의미한다. <맹자>의 주소에서 “천자는 천하를 갖는다”고 한 것은 이를 의미한다.
의미를 명료하기 위해 보다 후대를 살펴보자. 서한 무제대의 남월과 조선 정벌, 이에 이은 흉노에 대한 대대적인 정토전은 분명 중국황조들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사건이자 전기였다. 그러나 그 이전의 고제-여후-문제-경제 시기에 어떠한 적극적인 벌전이나 안무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사실상 통일황조의 외접책이라는 면에서 보면 무제는 파천황의 시기를 열었고, 이는 분명 예외항 중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남월과 조선에 대한 정벌을 전술했던 1차 안전보장의 대상인 ‘외신’ 혹은 ‘번속국’에 대한 것으로 간주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남월과 조선이 정토되고, 또 흉노가 막북으로 물러난 유지에는 한의 군이 설치되었는데, 일부는(북지, 상군 등) 내지의 군과 같았으나 대부분은 변군(邊郡)으로, 내속된 비한인 외족들의 반자치적 행정구획이었다. 동한 말 이후 조위 시기를 거치면서 변군이 내군화되는 경향도 일시적으로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이 ‘반자치적’인 ‘변군’이라고 하는 존재는 이후의 중국황조들의 외접책에서 매우 큰 대역을 구성하는 ‘기미정책’의 시발이 되었다.
다소 대등한 위치에서의 제세가 각축했던 육조 시기를 넘어 당대에 이르게 되면 이 기미정책은 보다 정묘하게 가시화된다. 태종이 돌궐과 토욕혼의 정토에 성공해 막남과 막북, 천산로를 장악했으나, 사실상 관중에 가까운 일부 대역과 요로의 오아시스 도시들, 막북초원으로 통하는 일부의 요구를 빼고는 직접 통할할 필요나 여력은 없었다. 그래서 변군과 비슷하게, 지역민이 그 생활단위를 유지한 위에 이름만을 내지의 부주현과 같은 격의로 붙였다. 이를 ‘기미(羈縻)부주’라고 한다. 이는 소위 ‘도호’라고 하는 당조에서 파견한 수장(戍將)의 직접관리를 받았지만 실질상의 자치는 유지했다. 여기서 혼동이 발생한다. 전기의 남조, 회흘, 토번과 같은 ‘외국’과 이들 기미부주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 전술한 대로 당조의 직접적인 행정, 군사적 통어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다. 남조, 돌궐, 회흘, 토번, 신라, 발해 등은 모두 ‘外臣’이라고도 불리는, 일정수준 이상의 정치체를 갖추고 내격적으로 권위를 인정받았으며 규모와 실력 면에서 총집적으로는 중조(당조)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한 정면을 곤란케 하는 데에는 충분한 국체/준국체들이다. 무언가와 유사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렇다. 근대 이후 ‘강대국’의 개념인, ‘완전히 패멸시키는데는 이르지 않으나 타방을 전쟁상태에서 결정적 패배로 몰아넣을 수 있는 국력을 보유한 주체’와도 상통하는 일면이 있다. 역내 최대의 수위국이자 문명표준이고 그 차이를 뒤집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중국황조’라는 요소의 존재만이 차이일 뿐이다.
명대에 들어서면 이 오해의 소지는 증폭된다고도 볼 수 있다. 할하/오이라트 몽골의 경우 지리적인 편집과 상대적인 역량의 차이 때문에 오히려 분정이 쉽지만, 요동-만주의 여진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에서 더 작은 분위를 이루고 있었던 여진제부는 기미부주체제의 계승인 기미위소체제에 편입되었다. 당조와 마찬가지로 명조는 이들에게 실직과 이름은 같지만 역내의 실 영병직은 절대로 아닌 직책을 가수하고 그 지배권을 인정했다. 이들은 명조에의 조반을 꾀하지 않는 대신 입공을 통한 경제적 이익을 보장받고 제부간의 분쟁이 있을 경우 명조의 조정을 받기도 했다. 분명히 이들은 자치적이었고 명대를 통틀어 그 정제에 공순하지만도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번속, 외신보다 훨씬 기생적인 정치권력을 형성했다. 예컨대 오이라트의 에센은 정통제를 포로로 하는 마당에 그들의 새서를 따로 필요로 하지는 않았고, 동몽골의 알단칸도 가정-융경제로부터 수작(受爵)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안남왕과 조선왕도 중조의 책명을 필요로 하긴 했지만, 특히 안남에서 볼 수 있듯 직접위협과 같은 정치적 상위의 변화 속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고집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미위소체제하의 여진 제부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 왕왕 회사(會賜)와 통치의 권리를 상징했던 새서(璽書)의 소유권을 두고 쟁탈전이 벌어졌다는 사실로서 이는 극명해진다.
청대에 들어서면 이는 비로소 명료하게 정리된다. <대청회전>에 명시된 것처럼, 중조(天下)를 뺀 나머지 국체/준국체들은 번부(내/외번)와 속국으로 명확히 나뉘어진다. 그 아래에 작명과 서열의 차이가 친소와 국력에 의해 분명 존재하지만, 전술했듯 이것이 주체간의 실질적 차이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청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중국황조의 완성형이었다. 당조가 다소 희석시켜서 달성했던 호한체제의 완성을 보았고, 판도면에서는 역대 최대의 강역을 확보했다. 진한대 이후로 팽창, 발달일로를 걸어간 관료체계와 말류까지 뻗는 행정력은 전근대로서는 그 극점에 달했고, 이것이 이전에는 중하와 그 변외로 완전히 나누어졌던 지리적 대역에까지 스며듦에 따라 중국황조는 아직 ‘애매한 단위(기미위소)’가 주변에 남았던 명조의 모순을 극복하고 ‘완결된 단위’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기미부주-기미위소의 흔적이 남은 최후의 행정단위인 맹기(몽골-티베트 내 몽골)와 티베트 신정, 서남의 토사에 대해, ‘외신-외국’을 담당한 ‘예부’가 아니라(총리각국사무아문이 성립되기 전까지 예부는 서양각국과의 사무도 담당했다) 별개의 조직인 ‘이번원’에 맡겨졌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물론 행정/문화상의 특이점도 작용한 결과이지만, 이들은 분명 ‘판도 내’에 확고히 자리잡았다고 청대에 들어서야 확인받게 된 것이다. 청대 ‘건륭 10전(十全) 무공(武功)’을 살피면 완성형의 중국황조가 내외역, 즉 중조로서의 천하와 그 밖의 세계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대만, 금천, 티베트, 중가르부에 대한 출병의 경우, 기본적으로 이들은 원래 ‘기미’받고 있던 기생적 단위를 이루고 있는 상태에서 청의 군사개입을 받았고, 각각 내지화되거나 청조의 통어가 강화되었다. 반면 월남, 남장(라오스), 곽이객(구르카)의 경우, 기본적으로 ‘외신-번속국’으로 인정받고 있던 일정 격의를 갖춘 ‘대외’의 정치체였고, 이에 따라 개입 후 친청적 정체를 부식시키기는 했어도 이를 내지화하거나 군을 진주시키지는 않았다. 이것이 ‘기미행정단위’와 ‘번속국’에 대한 명정한 입장의 차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측면은 쉬이 무시당하고 있다.
특이한 ‘기생적 단위’가 아닌 ‘외신-번속-외속’에 관한 정책적, 문화적 태도에서 중국황조는 그 입장을 서한대 이후로 전혀 달리한 적이 없다. “하늘이 세운 흉노의 대선우는 삼가 중국의 황제에게 묻노니 무양한가” - “황제는 삼가 흉노 대선우에 묻노니 무양한가”의 다이얼로그의 궤에서 약간분의 문식을 달리하는 것 외에는 본질적인 성격이 달라진 적이 없다. 중국황조에는 천하가 있었고 그것은 중국황조와 그 직간접적인 세력판도가 미치는 범위(기미부주-위소를 포함하는)와 직결되었다. 천조(天朝)라는 지칭어가 쓰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매카트니에게 고종이 ‘천조의 물산은 풍영하다’고 할 때에 그 천조(天朝)에는 영국이 들어가지 않는다. 중국황조는 항상 배외적이고 내부완결적 개념으로 스스로를 칭해 왔고 그것은 천하, 천조, 중조, 중국이라는 개념어로 상징되어 왔던 것이다. 한때 태종 이래 현종, 심지어 그 이후의 당제(唐帝)가 천가한(天可汗)이라는 호한융합적이고 내외일통적인 칭어로 번속에까지 불리웠지만(회흘과 돌궐이 이에 따랐다), 그것이 남조나 신라에 있어서 ‘천가한’인 것은 또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명대의 특수한 기미위소와 중조의 관계를 들어 ‘천하·국·가 체제’의 불균형성과 일방성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공정한 해석이라고 할 수 없다.
달리 또 설명하자면, 동아시아에서 압도적 중심국, 수위국, 문명표준 공급자로서 중국황조가 갖는 의미는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관계의 수평성을 무조건적으로 전제할 수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합스부르크조 신성로마제국에 대해 7선제후가 이러한 태도를 취했던 적이 있었는가? ‘크리스트교도의 왕’을 자칭한 프랑스 왕이나 영국 왕에 대해 주변의 작은 후국이나 대등한 국체가 비슷한 취의를 했던 적이 있는가? 이것을 긍정하지 못한다면, 중국황조의 그것이 구성해낸 ‘천하·국·가 체제’의 역사적 보편성과 지역적 특수성에 대해서는 어떠한 서구적인 정의도 일방적으로 내려서는 안 된다. 전술했던 대로 ‘천하·국·가 체제’의 각 행위자는 보편적 정격성을 일정 수준 확보한 상태에서 예외없이 명위와 실질 양면에서 스스로의 利를 위해 행동했고, 이것은 언필칭 소위 ‘근현대 (서구가 규정한) 국제관계’의 제성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결국 이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어엿한 ‘천하체제’를 몰아 규정도 제대로 안 된 강포한 ‘국제관계’에 맞서게 하는 셈이니 그 의론이 중정치 못함은 명백하다.
이와 같은 개념어와 실질관계의 역사적 누천과정, 그리고 지역적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번부, 속국(번속국), 외신-을 망라하여 마치 근현대 이후 서구에 의해 규정된 국제관계상에서의 관념적 행위자인 ‘국민국가’와 이들을 각각 그 대격으로 등치시키는 것은 큰 무리라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주인공이 ‘천하국가에서 국민국가로’ 변한 것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주인공이 변한 적이 없다. 주인공은 항상 국체/준국체적 혈연-지연-정치 집단이었다. 국제관계는 항상 ‘국제’ 관계였다. 이 ‘국제’를 서구적 의미로만 한정시킨다면, 다시금 정정할 수밖에 없다. 국제관계는 단 한번도 ‘국제’관계였던 적이 없다. 근대의 특정 사건군을 ‘세계의 충돌’로 과연 볼 수 있는 것인가?
종적 경험과 횡적 경험의 문제 : ‘4차원’의 ‘망’
‘동양’과 ‘전근대’에 대한 오해와 자괴감의 재생산구조 속에서 ‘늑대거미’적 수용자가 보이는 ‘망’의 이해와 구축은 실로 돋보이는 면이 있다. 요컨대 이것은 3.5차원적이다. 기존의 국제정치에 대한 이해가 행위자(점)와 양/다자관계(선)에 입각한 2차원적인 것이라면, ‘늑대거미’의 ‘망’은 여기에 행위자의 행동폭(Z축)과 행동의 양상(면)이라는 1.5차원이 더해진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의 의론에서 또다시 지극히 아쉬운 것이지만, 이 ‘늑대거미’의 이해구조는 외교사적 ‘연속성’과 분립되어 있다. 여기에 ‘시간’이라는 0.5차원을 다시 더하면 4차원의 ‘망’이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구한 말의 ‘사상적 혼세’를 뚫고 주체적 선택가능항으로 대두했던 수많은 담론들, 특히 ‘신경향에의 맹종’까지도 지양할 수 있었던 현실주의나 이상주의의 극점인 동양평화론이 대두할 수 있었던 기반은 무엇일까? 그에 대해서 단순히 ‘개안한 개화주의자들’이라는 설명으로는 설명을 완결할 수 없다. 공시적 경험, 횡적 경험만으로 이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만약 그러한 제성을 띤 것에 지나지 않았다면,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절박함이 없는 담론’에 그친 채 신문물의 부화한 대기를 떠다녔을 뿐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위와 같은 ‘천하·국·가 체제’의 종적 경험이 엄존했기 때문이다. 공시적-횡적인 ‘개안’과 더불어, 국체/정치체간의 기본관계에 대한 이해가 있기 때문에 적응도 부적응도 모색도 가능한 것이다.
사고구조는 無에서 형성되지 않는다. 보행 자체는 수의행동이지만, 걸을 때에 인간은 하나하나의 근육과 연결된 뉴런에 각각 수의적인 명령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신경에 축적된 경험이 세세한 수의적 지령 없이도 몸이 ‘보행’을 위해 동작하도록 해 준다. 마찬가지로 통시적-종적 경험은 개인이 표관적으로 부정하는 것과는 무연하게 정반적으로 그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신채호가 구사회-구국체를 부정해도 결국은 위인과 고대사로 귀착하고 마는 것도 매한가지이다. 조포하게 말해 ‘비정상적 전근대 일방관계’로서의 경험만이 존재했다면, 구한말~식민기의 국제정치 담론은 ‘독립청원’, ‘소련-인터내셔널의 원조 기대’, ‘자강 및 자치확보’, ‘반제국주의 연대 무장투쟁’이 아니라, ‘천붕지열의 세계에서 부조(父祖)를 잃고 공멸하는 인간형’에 대한 탐구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점은 사록을 통틀어 너무나도 명정하다.
‘하나의 천하에서 사해를 포람하는 것’은 이미 공자(孔子)가 부정하고 있다. 그는 숙신의 화살을 보고 ‘먼 이적(夷狄)’을 짚어내며 관중이 아니었으면 중하(中夏)는 ‘피발좌임(被髮左袵)했을 것’이라고 일갈한다. 대자(對者)가 없으면 자신도 규정되고 존재할 수 없다. ‘천하·국·가 체제’ 역시 이러한 통세의 理에 의거한 지극히 온당한 완결논리를 갖추고 있고, 그것은 분명히 현재 억지로 규정된 ‘근현대 국제관계’의 기본원리와 상통한다. 문두의 광평왕 이숙(대종)과 같은 사람은 그 理를 체득했기에 ‘이적에 굽혀 중하를 안정시키는’ 맹자가 말한 事小의 경지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이 엄연히 살아 있기에, 우리는 ‘시간의 0.5차원’을 ‘늑대거미 이해구조’에 더하여, 4차원의 망에서 보다 확장된 시역과 지역을 무대로 인류와 그 국제정치적 사상, 행동에 대해 검토해야 한다. 선생님의 의론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이것일 따름이다.
예로써 천하·국·가를 바르게 할 수 있다.
- <예기> 예운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