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씨발 병신같네 한글 각주도 제대로 쳐 안 옮겨지고 'ㅅ' ;;;
여튼 과제로 제출한 병신글이에여 ㅇㅇㅇㅇㅇㅇ
▲ 현실 그것은 현실
유구한 전통의 근왕(勤王)쿠데타
척족(戚族)의 세도와 전횡의 구태의연함이 문제가 된다. 집권도당이 궁성(宮城) 내의 위사(衛士) 친군(親軍)을 절제(節制)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애가 되고 있다. 기의(起義) 그룹 내에서 척족정치와 구당(舊黨)이 人主의 전제와 국체의 강상(綱常)을 어지럽힐 뿐 아니라 통치의 중정함과 정당성을 잃고 있는 현실에 대한 개신(改新)의 의지는 굳어져 있다. 가장 직접적인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기의그룹은 전중(殿中)의 친군을 회유하기 위해 노력한다. 드디어 거사가 시작되자, 약정대로 기의자들은 무력을 발동해 人主의 신병을 확보하고 척족과 그 부용들을 처단한다. 친군 각 영(營)은 일단 기의세력에 의해 장악되고, 주요 기의인물들은 황위(皇威)에 의지해 구당을 척결하고 개혁제책을 발(發)하며 추요(樞要)의 포스트를 점한다.
언뜻 1884년의 갑신정변의 개황을 묘사한 것 같지만 아니다. 기원전 180년 서한(西漢) 대에 혜제(惠帝)의 사후 임조칭제(臨朝稱制)한 여후(呂后)를 배경으로 집권해 온 여씨 일족과 그 부용세력을 배제하기 위해 기의했던 주허후 유장, 태위 주발, 승상 진평의 ‘친위 쿠데타’이다. 실은 이 구도는 그 이후 누차 중국황조에서 ‘청군측(淸君側)’ 혹은 ‘반정(反正)’의 형태로 일어났던 수많은 정변들에 그대로 대입될 수 있다. 이를테면 위후(韋后)의 전정을 무너뜨리고 예종을 복위시킨 현종 이융기의 쿠데타가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1884년의 정변에 대해, 기존 연구에서는 정변 후에 제시된 강령 등에서 읽을 수 있다고 주장되는 ‘개혁적 성격’에만 착목한 나머지, ‘근왕 쿠데타’로서 갑신정변이 가졌던 역사성과 전형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정체개혁으로서의 쿠데타의 전역적/혁명적 성격에 그렇게 비중을 뒀다고 한다면,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에 그토록 신경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人主, 국왕의 존재, 그리고 국헌과 통치행위의 근본이 되는 기관적 개인으로서의 국왕을 옹위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강력한 이점에 기반했기 때문에 김옥균은 ‘무력기의의 성공 후’의 전개에 대해 그렇게나 낙관했던 것이고, 그들의 패멸 역시 국왕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시점에서 결정되었다.
정변의 ‘개혁적 성격’이 과연 부각될 만한 성격의 것인지도 의문스럽다. 소위 개화인사들의 정체에 대한 이관(理觀)을 언급하면서 전술한 강령의 조항과 함께 익히 제기되는 것은 정변 기의자였던 박영효, 서재필 등의 저술과 정변 후 망명기간을 거쳐 조선에 돌아와 보인 그들의 정치활동의 공과이다. 예컨대 1888년 박영효의 상소에서 추출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있다.
대체로 인민이 있으면 정부가 존재하게 됩니다. 정부가 존재하면 다스림의 이치가 있게 되며, 다스림의 이치가 있으면 의론이 있게 됩니다. 또 의론이 있으면 이동이 있게 되고, 이동이 있으면 종횡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종횡이 있으면 당이 이루어져서 각각 그들의 의견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옛 붕당이며, 지금의 정당입니다.(1)
대체로 인간이 개명하게 되면 정부에 복종하는 도리와 정부에 복종해서는 안 되는 도리를 알게 되고, 또한 딴 나라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는 도리도 알게 됩니다... (중략) 그러므로 군권의 무한함을 공고히 하려 한다면, 인민으로 하여금 백치 바보가 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중략) 그렇지만 이런 헛된 말에 어찌 현실성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진실로 한 나라의 부강을 기약하고 만국과 대치하려 한다면, 군권을 축소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정당한 만큼의 자유를 갖게 하고 각자 나라에 보답하는 책무를 지게 한 연후에, 점차 개명한 상태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최상책일 것입니다. 대저 이와 같이 한다면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가 태평하게 될 것이며, 종사와 군위가 모두 함께 오래 갈 수 있을 것입니다.(2)
그런데 상소가 이루어진 시기에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변으로 인해 망명중이던 박영효에게 자신의 정치구상에서 가장 명정한 대조군으로 다가온 것은 1888년 당시 체재하고 있던 일본의 정정(政情)이었을 것이다. 당시 번벌정부는 후술할 1870년대 중반 이래의 정치적 난상을 어느 정도 극복하면서 1889년의 헌법제정/선포를 앞두고 1881년 정변 이후 가속화된 ‘흠정헌법 정체’의 정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1894년 귀국한 그가 제2차 김홍집 내각에서 추진한 정체개혁의 내역이나 독립협회와 관련된 활동 등외에서 살필 수 있는 것은, 그가 서구적 민권주의자였다기보다는 일본식 ‘흠정국헌 정체’주의자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가 치도(治道)의 구도로 인용하고 있는 레토릭은 <대학(大學)>의 명명덕(明明德)의 구도, 즉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팔조목(八條目)인 것이다.(3) 발산적 교화원리를 ‘교육’과 ‘자유’에 관한 항목 등에서 어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박영효가 이광린의 지적(4)처럼 ‘민권을 강력히 중시’ 했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게다가 전자의 ‘정당’에 관한 박영효의 유론은 대의제로 직결되는 것만으로는 볼 수 없다. 아래의 <건백서> 추출내용을 보라.
몇해 전에 이르러 당파가 또 다시 2개로 나뉘었는데, ‘새로운 것에 나아가고 자립한다’는 입장과 ‘옛것을 지키고 남에게 의존한다’는 입장이 바로 이들입니다. 신 등은, 나라의 사세가 급박한 것을 보고서 헛되이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나라의 부흥을 급히 도모한 나머지 잔혹하고 망령된 거사를 감행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신 등의 당)은 국체의 보존에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으므로 마땅히 정당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5)
본문에서 즉촉적으로 이해될 수 있듯이, 그의 ‘정당’에 대한 의론은 기본적으로 1884년 정변의 죄과를 해명하기 위한 전제이자 수단이었다. 전후의 사정과 공과가 어떠하든 간에 당의가 흥기하게 된 것 자체는 ‘충군애국의 정’이었음을 밝히지 않고는 사면을 기대할 수 없었던 박영효의 사정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이것 역시 ‘근대성 끌어올리기’를 위한 ‘장치’로 오도될 뿐이다.
정변의 시말에서 살필 수 있듯, 그들의 ‘목표’, ‘수단’, ‘조건’에 대한 현실적 평가 역시 지리멸렬한 것이었다. 사실상 그들이 정변에서 제기한 상기의 강령이 ‘개혁적’ 이라기보다는 ‘개변적’인 것에 가까웠을지라도, 그것을 최소한 통치담역층인 사족층 전반에 정체구성의 정당성을 의심받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이해시키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개화인사’ 들의 무신경함은 1881년 신사척사상소운동의 전말조차 제대로 이용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정향을 완전히 달리했지만, 신사 척사운동은 기본적으로 민씨척족과 구당이 온건개화파와 연대한 정체에 대한 반동이었고, 이것이 당년 이재선 옹립사건이라는 ‘폭발’로 까지 연결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존황양이(尊皇攘夷)’, ‘토막(討幕)’의 총체적 기의가 서서히 개명 번벌관료 주도의 정체 수립으로 전환해 간 메이지 정변의 전례로 이어질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골수 근황주의자나 시마즈 히사미쓰같은 구번주 제세가 1870년대 말까지도 존속했던 일본의 정정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대외 제세의 개입 가능성에 대한 평가나, 정변에 필수적인 ‘무력’의 준비에서도 개화인사들의 대비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강령’의 1조에는 대청 종속관계의 철폐와 이를 상징하는 듯한 ‘대원군의 환복’이 명시되어 있지만, 내밀한 각의에서의 결정사항이 아니라 공표된 정강으로서 제시된 본조에서 여하한 구체적인 실천사항이나 가능항에 대한 평가도 없이 허적한 목표만을 드러낸 것은 후술하는 것처럼 일본의 개입 지속에 대해 개화인사들이 얼마나 오판하고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무력적 준비 역시 망연할 정도로 불비했다. 기의 당일까지 그들이 자율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던 유효무력 자원은 사관생도 14명, 친군 전영군 70여 명, 장사(무뢰, 일본인 포함) 30여 명, 부상 100여 명으로 총 200여 명에 지나지 않았고, 여기에 일본 주류군 100여 명을 합쳐 겨우 3~4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6) 조선에 주류하던 6영 중 3영이 철수했다 하더라도, 남은 3영의 병대는 1300여명에 육박했고, 이들이 모두 모우저 라이플 등 근대적 무구를 갖추고 충분히 훈련을 받았음을 감안한다면 개입의지의 정도와 관계없이 정변의 도발이 극히 위험한 도박임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개화인사들은 정변 직후 전·후·좌·우 친군 4영을 신속히 장악해 총수 2000여 명에 달하는 친군과 일본 주류군으로 정변주체와 국왕을 경위하려 했다. 그러나 전·후영군의 장악이 순탄했던 반면, 한규직, 이조연, 민영익 등의 직접 통할 하에서 청국의 영향 하에 성장한 좌·우영을 경험이 적은 서광범이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친군 전체의 훈련도나 장비수준 역시 청군이나 일본군에 비해서는 일천한 수준이었다.(7) 12월 6일 최종적으로 청군이 내습했을 때 좌·우영이 청군에 동조했던 것은 이를 명백히 입증해 준다. 결국 수적 측면에서든 질적 측면에서든 결코 청이 남긴 ‘3영’을 압도할 수 없는 무력밖에는 갖추지 못했던 개화인사들이 성급하게 정변에 나선 것은 대외제세의 개입 가능성이라고 하는 ‘국제적 맥락’에 대해 물리적으로 전혀 합리적인 타산을 해내지 못한 결과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굳이 말한다면 전형의 승계로서 갑신정변은 ‘훌륭한 선례들’에 어울리지 않는 매우 미진한 것이었다. 정변을 뒷받침할 실질적인 무력적 준비는 미흡하기 짝이 없었으며, 국제정치적 맥락에서 공시적인 사세를 충분히 감안한 후 내린 결단도 아니었거니와, 이후의 제국면에 대한 여하한 복안도 배의도 없는 무책임한 개죽음에 가까운 결과값을 내게 되었다. 다른 시점에서 본다면 근왕쿠데타의 승계로서 대내 정정이라고 하는 조건과 그것의 개변이라는 목표만을 유의하고 충족시키면 되었던 ‘선례들’에 비해, 개입된 대외 제세의 영향력과 가능항을 면밀히 평가했어야 하는 것이 1884년 갑신정변의 선결적인 요건이었고, 소위 ‘개화인사’들은 이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불편한 사람들, 불편한 사실들
1880년대 초반 당시의 일본정부와 당시 외무경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가 김옥균의 3차 방일과 차관교섭을 전후해 이전의 전망과는 달리 개화인사들의 제안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고, 또한 조선에 대해 소극책으로 돌아선 것이 김옥균과 개화당이 구체적인 무력기의를 결정하게 된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환경상의 요소였다고 김용구와 이광린은 지적하고 있다.(8) 외원(外援) 자체가 기의의 핵심적인 인소였음을 감안한다면 이런 식의 ‘사태의 주도권’에 대한 발명(發明)-즉 개화인사들의 주동성을 강조하는-은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이겠지만, 여하간 일본의 향배가 최요사항이었음은 기존연구에서 폭넓게 인정되고 있다. 문제는 일본이 ‘움직인’ 맥락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신국주는 1881~1883년간의 김옥균의 교섭활동과 그를 전후한 일본의 대 조선 경략책이 매우 정연하게 일통된 정향으로 ‘침략적’으로 진행된 것처럼 묘사한다.(9) 심지어 김용구의 의론에서도 정부와 민권운동파(자유당)의 표면적인 ‘경쟁’을 설명했을 뿐, 일본이 이 짧은 기간(1875~1884) 동안 조선정책의 정향을 갈짓자로 해낼 수밖에 없었던 외적 요인과 국내 정정(政情)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지 못하다.(10) 그 결과 당기 일본정부는 ‘일통된 국론’으로 매우 평면적인 역분을 수행하며 약간의 ‘변덕’만을 보여줬던 ‘전형’으로 오해되고 있다. 또다시 그들의 ‘악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1884년 말에 이르기까지 소극책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국면의 시발점과 광협에 따라 두 가지 시점(始點)에서 파악될 수 있다. 첫째는 외인적인 것으로, 특히 대만침공(1874)을 전후해 일본이 겪게 된 대외적 사정이다. 둘째는 내인적인 것으로, 보다 구체적으로는 잔류정부 내의 파쟁의 향배와, 이후 정한론 정변에서부터 심화된 번벌 참의정치 구도의 난맥상이다. 이 양자의 접점이 되는 것이 바로 1879년 힘든 과정을 거쳐(후술할 것이다) 참의·외무경으로 대 조선정책의 실무를 맡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이다.
신정체의 구성 후 1871년 조약개정 교섭과 신제(新制)의 학습/수용을 위해 번벌내 주요인물로 구성된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이 출발하자, 국내는 이른바 폐번정부의 정맥을 잇는 잔류정부가 기도(木戶) 파벌에 의해 장악된 대장성(大藏省)이 태정관제 하의 각 기관을 통어하는 형태로 제 개혁책을 추진했다. 당시 대장대보(大藏大輔)로 재직하던 이노우에는 재정지출을 억제하고 기도 파벌의 수권을 유지하기 위해 1871년 출발시 사절단과 잔류정부 사이에 체결된 내정개혁의 약정서 문면 범위 내에서만 개혁을 실행하려 했으며, 자연스럽게 이것은 대외 소극책을 결정하게 되었고, 대장성 외의 타기구와 번벌정파들과의 대립을 불러왔다. 이와 같은 경색국면을 대외진출로 무마하려는 시도의 계기가 된 것이 1872년 조난당한 류큐인을 대만인이 습격한 사건이었다. 대대적으로 정대론(征臺論)이 대두하자 이노우에는 이를 불식시키고 청에 사절을 보낼 것을 결정했고, 결국 이것이 내분을 격화시켜 차년(1873) 5월 태정관 윤식(潤飾)을 통해 대장성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고 이노우에는 사임하기에 이른다. 출발점에서부터 그는 개인적으로든 정파상의 입장으로든 대외 소극책을 주장했던 것이다.(11)
1873년의 정한론 정변으로 사쓰마-죠슈-도사 체제에 균열이 생기자 문제는 보다 심화되었다. 사직한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민권운동에 투신하자 번벌정부는 사론(士論) 외에 중론(衆論)에도 맞서야 하게 되었고, 재야의 정한파(征韓派) 역시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정한파 배제의 입장과는 상치되는 것이지만 정국의 돌파구로서 부득이하게 오쿠보 정권은 1872년의 사건을 들어 대만을 침공했으나, ‘화외민(化外民)’으로서의 류큐에 대한 대응과는 달리 이미 건륭연간에 내지화되어 있던 대만문제에서 청의 입장은 단호했고, 결국 오쿠보 자신이 교섭에 임해 겨우 협정 체결에 성공했다.
류큐의 편입(1879)이 청조가 이리 분쟁이라고 하는 특수한 사세에 당해 여력이 없었던 시의를 얻은 것이고, 조선과의 국교 수립(1876)이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시마즈 히사미쓰라는 신구(新舊) 양면의 문제 발생에 더해 예상될 수 있는 정한파의 대두를 막기 위해 조선내 정정의 변화(민비의 집정)와 청의 묵인이라는 상황 변화를 적확하게 활용한 것임을 감안한다면, 청과의 직접충돌을 무릅쓴 이 대만 침공 이후 1884년의 갑신정변에 이르는 시기까지 일본은 결코 대외적극책을 선택할 수 있는 사세가 되지 못했고, 선택하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시금 1882년 7월 30일 임오군란 직후의 각의에서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가 ‘먼저 함대만 파견하여 담판하고 그 후에 출병문제를 재론하는’ 열강의 의향을 의식한 제안을 했던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사쓰마계의 구로다는 즉각 육군을 파병해 개전하자고 주장했다(12)). 사실상 한학자로서 문묵에 가깝고 북양관계와도 접점이 있었던 다케조에(13)가 공사로 파견된 것 자체가 대조선 소극책을 상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극개입에 미온적이었던 이유를 일본 스스로에서 구할 수 있다면, 또다시 그것을 번복하고 새로운 조선정책의 정향을 시도했다가, 그것이 돈좌되자 다시금 소극책으로 회원한 이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것 역시 출발점은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있다. 정한론 정변 직전 대장성을 떠난 이노우에는 1875~76년에 걸쳐 모종의 오직(汚職)행위에 휘말려 있었다. 오자리자와 광산 사건으로 불리는 이 건에서 이노우에의 지연과 관련된 정상(政商)과의 유착이 문제가 되었고, 이 추문은 항간에서 번벌정치의 평판을 떨어뜨렸을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그가 구로다의 부사(副使)로 조선과의 조약체결에 공헌했음에도 불구하고 1879년의 조각에서 참의로 기용되는 것에 대해 천황이 명백한 반대의사를 표하게 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홋카이도 개척사 불하 사건과 이로 인한 1881년 정변으로 오쿠마 시게노부가 실각하여 민권운동으로 돌아서자, 참의정체 내에서 보다 외연이 축소되었으면서도 오히려 더 공고한 결합을 형성하게 된(구로다-이노우에 관계가 대표적일 것이다) 삿쵸번벌 내에서 이노우에는 개인적으로도 파벌 전체로도 점점 구체적인 ‘공적’를 필요로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서 청불전쟁이 발발했다.
김용구는 고토 쇼지로와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당기 청불전쟁으로 형성된 제세의 대립구도에서 ‘정부 외적’으로 주도한 ‘자유당의 조선 자립정책’에 지나치게 무게를 둔 나머지, 마치 1883~84년의 전계적 상황 변화가 번벌정부에 비해 지의가 일통되어 있었고 일정 수준 기의를 물리적으로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던 일본내 민권파(자유당)의 책동을 정부가 강하게 의식하게 되어 일어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14) 그런데 실상은 자유당이 번벌정부의 정책정향을 농단한 것이 아니라, 자유당 스스로도 참의정체의 책동에 놀아나고 있었다.
우선 고토와 이타가키는 프랑스 공사 상코비치와 회견하는 시점에서 이미 공주(共走 : run together)하고 있지 않았다. 이는 이노우에의 책략에 의한 것으로, 그는 자유당 내에서 이타가키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고토를 부추겨 이타가키가 정부자금으로 외유(外遊)에 나서도록 했다.(15) 예상대로 자유당 내부에서는 기관지 <자유신문> 등을 통해 반발이 일어났고, 지원받은 자금의 전용 문제로 인해 고토와 이타가키는 결별하게 되어, 이후 1890년대 초반에 이르면 자유당이 대외 강경주의의 입장에서 사실상 정부와 보조를 맞추게 되는 상황을 낳게 했다.(16) 이타가키와 자유당이 프랑스에 ‘조선 자주’에의 협력을 요청한 것은 어떤 손익에 대한 장기간의 심려로 인한 것이 아니라, 허영가 고토 쇼지로가 후쿠자와의 주선과 이토의 조선 파견에 대한 제의로 공명심을 자극받아 일으킨 한바탕의 촌극이었던 것이다.
자유당의 지원 의사가 이처럼 일통되지도 지속적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김옥균과의 직접 접촉을 거쳐 고토가 준비했다는 자원도 한미한 수준이었다. 그는 김옥균과의 대화에서 ‘천여 지사(志士)’ 운운했지만 실제로는 백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낭인들을 준비했을 뿐이며, 지원금 역시 전혀 호언한 대로 준비할 수 없었다. 자유당의 이와 같은 ‘시도’ 역시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었고, 번벌정부가 필요성과 위험성의 천칭상에서 불리하다고 판단될 경우 이에 대해 대응해오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예컨대 청불전쟁중 자유당원 다루이 도키치, 이즈미 구니히코 등이 참모본부 파견장교 오자와 유키로와 공모하여 푸저우(福州)에서 폭동을 일으키려 했을 때 번벌정부는 참모본부 명령으로 이를 곧바로 중지시킨 적이 있었다. 이노우에는 이와 같은 얼렁뚱땅하고 위험천만한 공론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고, 또 청불전쟁의 호기 자체는 결코 놓칠 수 없었다. 전술한 ‘정치적 필요성’에 더하여, ‘정신적 지원’ 면에서도 실질적인 측면에서도 ‘제대로 기의를 뒷받침할 수 없는’ 자유당제 조선 자주책의 실상을 목도했을 때 그는 이토와의 협의를 통해 전환을 결심했고, 이것이 11월 3일의 지원 의사 시사로 이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쿠데타를 장기적, 전폭적으로 지원할 수 없는 이유는 자명했다. 우선 군비와 재정적 차원에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873년 징병령 제정시 육군전력 평시 4만 이상 확보, 해군전력의 경우 매년 3척의 신함(新艦)을 건조한다고 하는 계획이 수립되었지만 1880년대의 광범위한 재정위기 속에서 이와 같은 목표는 결코 달성될 수 없었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이 목표를 보다 확대한 군비확장계획(육군 상시전력 7만 확보)이 발동되었지만, 1883년에 시작된 후 마쓰카타 디플레이션(1881~92) 하에서 증세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 역시 좌초되고 말았다.(17) 결과적으로 갑신정변 후 텐진조약 체결을 통한 청일관계의 원만한 해결과 거문도 점령사건 이후의 청일 협조노선은 시급한 군비확장을 장기계획으로 전환하고 세원 부담을 줄여 아이러니하게도 메이지 정체에 재정상으로 숨 돌릴 틈을 주었던 것이다.
조선문제보다 1880년대 초반에 메이지 정체가 직면했던 더더욱 중요한 과제는 ‘국헌 제정’이었다. 정한론 정변을 전후해 민권운동이 대두하면서 입헌정체에 대한 구상과 시도가 난립하게 되었고, 이는 의회정치 구상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근황 시보(侍輔)계파의 반번벌적인 개변 시도로까지 연결되어 번벌정부는 위아래로 적을 맞게 되었다.(18) 임오군란의 수습과 이토의 텐진조약 체결에서 각각 일본이 일정분의 양보사항을 감수하고 조속히 분의를 매듭지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게다가 1882~83년에 걸쳐 이토는 민권주의적 국헌도, 근황주의적 발상도, 프랑스/프러시아적 모델도 아닌 ‘일본만의 흠정헌법’을 위한 학습 차원에서 해외 순방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1881년 정변을 전후해 1884년 7월 7일의 화족령 제정에 이르는 시기는 국내정정의 복잡상 속에서 헌정구상의 대간을 결정한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후 1889년 헌법안이 확정될 때까지 분의(紛議)는 끝없이 이어졌다. 신헌법 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각제도 수립에 관한 관제개혁안이 1885년 초에 발의되었지만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이토가 텐진조약의 조인을 마치고 돌아온 1885년 4월 28일이었다(19)는 점은, 일본이 이 중요한 시기에 외접과 내정에서 모두 성공할 수는 없었음을 역증해 주는 사례이다.
1870년대 중반부터 1880년대 후반에 이르는 시기 일본 정계의 난상(亂象)은 교과서적 이해의 차원을 훨씬 벗어나는 수준이었다. 1880~90년대에 걸쳐 이른바 ‘번벌중심 메이지 흠정국헌정체’의 형성과 묵수에 공헌한 번벌정부의 주요인물 중 많은 수-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구로다 키요타카, 사이고 쓰구미치 등-가 이 시기에 정상(政商)과의 유착스캔들이나 무궤한 정실인사로 정쟁을 복잡화시켰고, 이는 메이지 정부의 대외정책 정향과 그 실행에 자주 강력한 장해로 작용했다.
이와 같은 구체적 사실의 영향을 무시하고 1870년대 후반~188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 ‘일본정부의 총의’를 일통되고 지속적이었던 것으로 단순화시키거나, 국내 정정상 제세간 관계뿐 아니라 각 세력 내부의 사정까지 감안하지 않고 정책결정의 향배를 조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잘라서 말한다면 협잡꾼 고토 쇼지로의 경동(輕動)이 아니라, 참의정체 번벌정부 스스로가 갖고 있던 문제점과 지속성이 갑신정변을 전후한 일본의 정책결정에 훨씬 크게 작용했다. 대자의 행동의 배경과 근거를 확인하지 않고 이와 같이 표관적인 결과값만을 획득하는 것은 행위의 윤리상 판단에는 어울릴지 몰라도 대자가 결정한 행동의 진실성과 지속성을 평가하는 데에는 여하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역으로 말하면 <갑신일록>과 다른 기록에서 보이는 김옥균 및 개화인사들과 다케조에 신이치로, 이노우에 가오루, 고토 쇼지로, 후쿠자와 유키치 등과의 대화에서 명정히 드러나듯, 이와 같이 개화인사들이 ‘겉핥기’ 식으로 일본을 평가하고 재단했기 때문에 그들의 실패는 자명했던 것이다.
(1) 박영효, 『건백서』p.286
(2) 박영효, 전게서, p.279~280
(3) 박영효, 전게서, p.280
(4) 이광린, 『한국사강좌 5 : 근대편』제2장 p.131~132
(5) 박영효, 전게서, p.286
(6) 박은숙, 「갑신정변 주도세력의 참여층 포섭과 무력동원」p.26
(7) 박은숙, 전게서, p.27~28
(8) 김용구, 『임오군란과 갑신정변』p.146~147
(9) 신국주, 「갑신정변의 대한 재평가 1」『갑신정변연구』p.184~186
(10) 김용구, 전게서,
(11) 다카하시 히데나오, 『새로 쓴 일본사』p.380~382
(12) 후지무라 미치오 저, 허남린 역, 『청일전쟁』p.19~20
(13) 신기석, 「갑신정변과 한청일 외교관계」p.4
(14) 김용구, 전게서, p.159~174
(15) 미요시 도오루 저, 이혁재 역 『史傳 이토 히로부미』p.269~270
(16) 후지무라 미치오, 전게서, p.27
(17) 다카하시 히데나오, 『새로 쓴 일본사』p.404~408; 후지무라 미치오, 전게서, p.23~24
(18) 방광석, 『근대일본의 국가체제 확립과정』p.100~110
(19) 방광석, 『근대일본의 국가체제 확립과정』p,168